냉소클럽

사람들은 흔히 ‘옛말에 틀린 것이 없다’라고 하는 데 나는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아니, ‘옛말에 맞는 것이 별로 없다’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던 상식 중엔 한 꺼풀만 뒤집으면 오류투성인 것이 많다. 얼마 전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한 가지 행위로 두 가지 효과를 얻는 경우에 적합한 표현을 학생들에게 물어봤더니 “일석이조”라고 즉각 대응한다. 어릴 때부터 들어왔던 너무나 당연한 답인지라 약간의 주저함도 없었다. 나 역시 이 표현을 자연스럽게 쓸 때가 많지만 사실 단 한 번도 이 말이 가슴에 와닿은 적은 없었다. 시골 살던 어릴 때 혹시 하는 생각에 지나가는 새를 향해 돌을 참 많이 던졌었는데(사실임!) 근처에 간 적도 없다. 두 마리는커녕 한 마리를 잡았다는 사람도 내 평생 보지 못했다. 그저 새도 사람도 함께 원시적이었던 시절에나 잠시 가능했던 얘기를 왜 지금껏 하는 걸까. 

다른 표현들도 마찬가지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라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의 뜻조차 애매하다. 그나마 한때는 좀 통했을 법한 문구가 “님도 보고, 뽕도 따고”이다. 예전엔 농가에서 누에를 많이 길렀는데, 그 먹이가 뽕잎이다. 잎이 무성한 뽕밭이 당시 남녀가 남 눈을 피해 만날 좋은 장소였나 보다. 그런데 나에게도 생소한 이런 영화 속 장면이 요즘 학생들에게 먹힐 리 없다. “도랑 치고 가재 잡고”도 마찬가지다. 10여년 전만 해도 학생들 상당수는 할머니가 시골에 사셨다. 지금은 여름 방학 때 시골 사는 사촌 상국이와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아본 친구가 매우 드물다.

사실 별 대단한 얘기도 아니다. 시대 환경이 달라지면 예전 표현이 어색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원뜻에 구애받지 말고, 그 표현이 주는 의미에만 집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비유적 표현이라도 좀 느낌이 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이런 단순 비유 차원을 넘어 뭔가 교훈이나 가치판단을 내포한 표현으로 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예컨대, “조삼모사”는 원숭이의 사리분별 없음을 조롱하는 표현인데, 나는 이 말을 별생각 없이 인용하는 인간들이 더 무식하다고 생각한다.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를 받는 것이 어찌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 받는 것과 같은가. 현재가치가 다르고, 유동성 효과도 다르다. 여기에 주인에 대한 신뢰 문제까지 가미한다면 원숭이의 주장은 경제학적으로 매우 현명한 선택이다. 

그래도 이건 애교다. 옛말이나 속담 사용에 있어 내가 가장 불편해하는 것은 이를 통해 자기주장을 펴거나 가치를 주입하려는 사람들이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훈육할 때 자신의 경험, 나아가 조상의 지혜를 들먹거리는 경우가 많다. 이것도 모자라는지 우리는 남의 나라 속담까지 침 튀기며 인용한다. 왜 그럴까. 뭔가 나보다 높은 권위를 빌려 내 말을 전하면 더 먹힐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듣는 아이들 생각도 좀 해야 한다. 저축의 중요성을 차분히 설명하면 되지 왜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태산’을 들먹이는가. 신중함의 가치를 말하는 것은 좋지만 요즘 우리 땅 어디에도 찾기 힘든 돌다리를 두드리며 건너라하면 잘 먹힐까. 

그래도 거의 평생을 주입식 교육, 세뇌형 정치에 시달려온 기성세대 보통 사람들의 수동적 습성은 이해해 줄 수 있다. 하지만 후세 교육을 담당한다는 사람들이 논리로 설득하기보다 권위를 빌려 제 생각을 내세우려 하는 것은 보기가 좀 그렇다. 나아가 그 권위라는 것이 외제라야 더 힘을 받는다 여기는 딱한 분들도 많다. 우리나라 지식인들 중 툭하면 외국 무슨 대학(특히, 하버드대)의 어떤 교수(우리는 전혀 모르는 사람)가 한 말이라며 은근히 자기주장을 에둘러 늘어놓는 사람들이 많다. 서구화가 본격화되기 이전, 공자님 말씀이 어떻고 떠들던 자들처럼 열등감에 찌든 지적 사대주의의 한 단면일 뿐이다. 

공자가 살던 절대 권력의 시대에는 배움의 성과가 권력으로 환산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식의 가치를 우리 모두의 삶과 연관지어 생각한다. 상명하복적인 권위를 강조하는 측면이 강한 공자의 교육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긴 어렵다. 예컨대 부모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라는 말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달라진 환경에서는 같은 가치라도 다른 논리로 설명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수 있다. 하버드 같은 유명 대학의 학자가 한 말이라도 그 말의 제도적 맥락이 생략되면 단순한 표현에 불과하다. 남의 말을 인용하려면 제대로 하거나, 내 주장을 하려면 좀 정직하게 논리를 구성하는 것이 지식인의 기본자세다. 정치인들이 툭하면 어디서 베껴 왔을 사자성어를 동원해 잘난 척하고, 몇몇 교수들이 한 해를 정리한다며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한자 숙어를 내세우는 걸 보면 쓴웃음이 난다. 그렇게들 자신이 없는가.  

어쨌거나 강의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눈높이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단순한 지식이나 사고의 격차 문제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일이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예전에 수업 시간에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Early bird”와 관련된 속담을 영어로 말해보라 했더니 한 학생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The early bird catches the early worm!” 다들 한바탕 웃었는데, 가만 생각하니 이 학생 말이 맞다. 일찍 일어난 새가 일찍 일어난 벌레를 잡아먹는 것이 뭐가 이상한가. 너무 나대지 말고, 적당히 게으름 피우는 게 ‘화’를 피해 가는 길이라는 멋진 재해석이 가능하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비슷한 시간에 일어난 그들이 서로 마주칠 확률이 높다는 논리적 표현이라 봐주면 된다. 

어쩌면 좋은 교육이라는 것은 편하게 생각하게 그냥 좀 놔두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다시 글 머리로 돌아가, 하나의 시도로 두 가지 효과를 본다는 뜻을 요약할 표현을 못 찾아 절절매는 나에게 마침내 한 학생이 소리쳤다. “일타쌍피!” 모두들 크게 웃고 동의의 눈길을 보냈다. 그래, 이게 그나마 최선의 선택이다 (14.03.29).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