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재정

[전문가 제언] 유능한 정부는 조세 원칙에 충실한 법

개혁의 핵심 전략은 세제 단순화·세원 다양화·지대과세에

부동산 물론 금융 자산에도 과세하는 방식으로 흘러가야

 

조기 대선 정국을 가정하겠다. 그렇다면 새 정부의 명운을 좌우할 요인은 무엇일까? 아마 무너져가고 있는 민생을 되살리는 일일 것이다. 특히 지금 같은 위기 상황에서는 정권 초기에 경제주체의 신뢰를 얻는 것이 필수다. 그래야 정부의 핵심 어젠다가 힘을 받을 수 있다. 어차피 거대 정당 중심으로 양극화한 정치 지형은 크게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응집력이 강한 양극단의 코어 집단일수록 집권당이 무슨 일을 하건 반대부터 하고 나설 게 뻔하다. 중도층도 일단 시큰둥한 시선으로 정책 성과를 지켜볼 것이다. 한 마디로 대선 후 허니문 기간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 결국 경기, 물가, 소득, 일자리 등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영역에서 눈에 띄는 성과가 있어야 민심이 따라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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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경제 정책, 조세에 승부수 둬야

더구나 다음 정부는 정권 인수 기간이라는 완충장치도 없이 바로 업무를 시작해야 한다. 권력 주변을 맴도는 사람이야 넘치는 만큼, 기존 조직이나 정책 체계를 유지하며 나라가 돌아가는 듯한 모습을 보이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무거운 정치 상황에 짓눌린 소비나 투자 심리는 정권이 바뀐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무기력한 정권들의 연이은 집권으로 경제의 구조적 비효율과 계층 간 격차도 심각한 상황이다. 나아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전쟁과 윤석열 정부의 계엄 사태가 촉발한 대내외 환경의 불확실성 탓에 기존 정책 수단 중 그대로 쓰기 어려운 것이 적지 않다.

이럴 때일수록 장기적 관점의 구조 개혁과 단기적 관점의 유연한 정책 변화를 함께 추진할 체계적 정책 프레임이 필수다. 이전 정권들처럼 대통령 개인 선호에 기반한 ‘소신 정책’이나 직전 정부의 자취를 지우는 ‘물타기 정책’을 남발한다면 다음 정권의 운명도 뻔하다. 초점 없는 백화점식 정책 나열이나 맥빠진 교과서식 처방으로는 이미 충분히 허약해진 경제를 되살리기 힘들다.

우선 대표적 경기 부양 수단인 금리의 경우 큰 기대를 하기 어렵다. 경제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서는 금리 인하 같은 가격 유인의 총수요 진작 효과가 크지 않을 수 있다. 원화 가치 하락으로 인한 수입 물가 상승이나 부동산 투기 같은 부작용도 고려해야 한다. 그나마 새 정부가 힘을 쓸 수 있는 영역은 재정 정책이다. 하나는 경기를 살리고 어려운 계층을 지원할 정부 지출을 늘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금을 깎아 소비나 투자 심리를 자극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확대 재정이 별 성과도 못 올린 채 재정 건전성만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재정 지출의 경우 금리나 세금 인하와 달리 직접적으로 총수요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적절한 타기팅만 이뤄지면 경기 부양 효과가 상대적으로 클 수 있다. 다만, 불확실성이 높은 위기 시에는 찔끔거리는 추경 편성보다는 아예 국민에게 양해를 구하고 과감한 예산 투입을 하는 편이 낫다. 반면 같은 확대 재정 수단이라도 세금 인하는 훨씬 신중해야 한다. 일시적 지출 증가와 달리 감세는 쉽게 되돌리기 어렵기 때문에 구조적 재정 적자 요인이 될 수 있다. 특히 지금은 작은 정부 시대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 정부 역할이 강조되는 상황이다. 따라서 재원 확보에 대한 충분한 고려 없이 감세를남발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리즈 트러스 전 영국 총리는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레이건식 감세’를 추진하다가 시장의 반격을 받고 역대 최단명 총리라는 오명과 함께 물러났다. 윤석열 정부도 자신들만의 체계적 비전이나 세밀한 전략 없이 그저 문재인 정부가 올린 법인세율을 다시내리는 것을 ‘세제 정상화’라 부르며 정권의 대표 정책으로 밀어붙이려 했다. 반도체 등 전략 사업 지원이 주된 목표라면, 세수 비용이 큰 세율 인하보다는 투자 유인 방식이 적절하다. 이렇게 투자실효세율을 낮추면서 규제 정비 같은 정책에 초점을 뒀다면 보수의 색깔에 맞는 실효성 높은 정책 조합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정권의 재정 분야 승부수는 무엇일까? 일단 시급한 민생 안정을 위해서는 과감한 지출 확대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 만일 올해 추가경정예산을 시행한다면 초점과 우선순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일반 예산처럼 여기저기 나눠 집행하면 ‘눈먼 돈’으로 인식돼 효과도 떨어지고 정치권의 이권 개입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다. 눈에 띄는 효과를 볼 수 있는 영역에 집중해 빠른 효과를 내야 정권의 신뢰도가 높아지며 다른 정책들이 탄력을 받을 수 있다.

문제는 재원이다. 평소 건전 재정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위기 때 과감한 적자 재정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 재정 여건을 보면 매우 암울하다. 외환위기 이전의 건전 재정 기조는 사라진 지 오래고 정권을 이어가며 누적된 적자 탓에 정부 채무규모가 국내총생산(GDP)의 50%를 훌쩍 넘어가고 있다. 나아가 최근에는 예산 편성 과정에서 예측하지 못한 세수 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2023년 56.4조원, 2024년 30.8조원). 경기 부진으로 법인세수가 급락한 탓도 있지만, 조세제도 자체가 세수 탄력성을 잃은 탓이 크다.

 

세수 확보 통한 과감한 재정 지출 필요

현행 조세제도는 지난 수십 년 제대로 된 개혁 없이 임기응변적 개편만 지속한 탓에 비효율과 불공평으로 얼룩진 누더기 세제다. 세수 확보를 위해 약간의 세율 인상을 한다고 해도 이에 따른 효율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이런저런 구멍이 많아 조세 회피가 쉽고, 세 부담의 형평성이 보장되지 않으니 조세저항도 크다. 결국, 근본적 조세 개혁이 없으면 해결되기 어려운 측면이다.

그런데 지난 수십 년간 몇 번의 정권 교체가 있어도 조세 개혁에 대한 변변한 공론화조차 없었다. 부동산세, 상속세, 금융투자소득세 등 그저 당면한 문제를 땜질 처방으로 해결하는 습성만 굳어져 갔다. 만일 다음 정권이 한편으로 임기 내 정부 살림을 위한 세수 확보에 성공하고, 다른 한편으로 구조적 조세 개혁의 청사진을 마련할 수 있다면 이것만으로도 유능한 정부 반열에 오를 것이다.

향후 한국 경제가 안정적 성장 기반을 유지하려면 재정의 뒷받침이 있어야 하고, 그 핵심은 세수 기반 확보다. 중장기적으로는 기존 세제의 비효율과불공평을 대폭 줄이며 조세부담률을 GDP의 5% 정도 높일 수 있는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다. 개혁에는 다양한 내용이 포함되지만 이를 관통하는 핵심 전략은 세제 단순화, 세원 다양화, 그리고 지대과세다(필자의 저서, <재정전쟁>, <개혁의 정석> 참조).

우선 세제를 대폭 단순화하면 이 자체만으로 효율 비용 및 조세저항이 감소해 상당한 세수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세무사도 포기하고 울고 간다는 부동산 양도세제는 겉으로 드러난 한 사례일 뿐이다. 소득세와 법인세의 조잡한 세율 체계, 땜질 개편의 누적된 결과인 각종 비과세·감면 등 손댈 수 있는 영역이 한둘이 아니다.

세원 다양화는 성장에 따른 세수 탄력성을 높이고 특정 세목에 세 부담을 집중하는 데 따르는 효율 비용과 조세저항을 줄일 수 있다. 예컨대 45%에 이르는 최고소득세율을 추가 인상하겠다는 ‘부자과세’ 발상은 상책으로 보기 어렵다. 차라리 내 책에서제안한 사치세나 일회성 횡재세가 나은 선택일 수 있다. 기존 세제를 단순화한다는 전제 하에 계층 간·세대 간 재분배나 저출생 같은 국가적 관심사에 초점을 둔, 동기가 확실한 목적세도 생각해볼 수 있다. 물론 손쉽게 세수를 올리는 방안이 없지는 않다.

현재 10%인 부가가치세율(OECD 평균 19.3%)을 1~2%p 올리면 순식간에 세수가 10조~20조원 늘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최종 병기’는 다른 구조적 해법을 모두 소진한 다음 고려하는 것이 옳다.


세 부담의 형평성은 반드시 보장돼야

또 다른 중요한 과제는 부자 과세의 타당성을 지대 과세의 관점에서 재조명하는 일이다. 안정적 조세 체계를 위해서는 중산층이 두꺼워 이들의 십시일반이 핵심 세수 기반이 되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경제력이 집중된 한국 경제 구조에서는 부자들의 세수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부자는 조세회피와 조세저항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능력원칙’에 입각한 막연한 ‘로빈후드’식 과세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혁신에 기반한 생산적 지대는 이동성이 높아 과세 실효성이 크지 않다. 반면 고도 성장기의 지가 상승에 기반한 불로소득과 권력 비호 아래 누적된 비생산적 지대에 대한 과세는 주저할 이유가 없다. 즉, 같은 부자라도 똑같이 취급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부자 과세의 경우에도 세원의 다양화 원칙은 동일하다. 향후 재산 과세는 부동산만 볼 것이 아니라 금융자산까지 포함하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 자산의 스톡이나 수익에 대한 과세 방식도 편협한 관행적 믿음에서 벗어나 큰 틀에서 재정비해야 한다. 폐기된 금투세의 경우 명분은 있었지만 자본이득 과세의 복잡성과 세 부담 전가를 고려할 때 거래세보다 낫다는 보장이 없다. 상속세의 경우 유산취득세로의 전환 등 개선의 여지가 많지만, ‘가업 승계’라는 명분 아래 불로소득이 다음 세대로 이전되는 부조리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이 모든 일이 하루아침에 해결될 수는 없겠지만 확실한 미래 비전을 보여준다면 납세자들의 저항이 수그러들고 정부의 신뢰도는 높아질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제도적 여건에 부합하지 않은 정체불명의 조세 속담들은 버려야 한다. ‘세금 안 내는 사람이 많다’고 하지만 소비세 비중이 높은 한국에서는 노숙자나 청소년도 적지 않은 세금을 낸다.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다’고 하지만 영세 계층의 소득이나 혁신의 대가는 과세하지 않는 편이 낫다. ‘거래세보다 보유세’라는 주장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어렵다.

유능한 정부라면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하지 않는 조세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첫째, 세금은 국가와 시민의 암묵적 계약이기 때문에 정당한 대가 없는 일방적 세금 부과에는 저항이 뒤따른다. 즉, 정부 신뢰도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둘째, 같은 액수의 세금을 거두더라도 자원 배분의 왜곡 효과가 작아야 하고, 세 부담의 형평성이 보장돼야 한다. 둘 다 쉽지 않은 명제다. 세금을 정부의 일방적 권한처럼 여기며 설치던 정권 치고 성공한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새 정부가 한 번 더 되새겨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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